마침내 한 해의 가장 더운 날이 되었다. 염소뿔을 녹인다는 폭염이 쏟아졌다. 초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왕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로 오른 병사들은 여름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뿔피리를 길게 불었다. 이날부터 사흘 간은 서북에 사는 모든 이들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던 일을 쉬었다.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 나가 있던 이들도 여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첫날밤을 치르기가 무섭게 부부목이 훌쩍 자라버렸다. 지수는 휘장을 걷자마자 나타난 풍경에 제가 잠이 덜 깬 줄 알았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묘목에 불과했던 나무들이 서로 몸통과 가지를 얽고는 천정에 닿을 듯이 커진 채였다. 부부목을 받을 때 들은 바로는 제대로 된 모양을 잡기까지 적어도 석 달은 걸린다 하였는데, 두 사람의 부부목...
이번에는 정한이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워낙에 감각이 좋은 편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임을 바로 알아차린 그가 지수의 손을 움켜쥐었다. 삼 년을 혼자 속으로만 다듬었을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와 살면 행복한 일만 있을 거라고는 못 하겠다.” 듣기에 좋고 멋들어진 말이 아니었다. 해서 꾸며낸 수식 같지 않았다. 지수는 그를 바라보며 다음 ...
지수도 서북에서 살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적들이 그 모습을 분명하게 내보이기 전에는 맞서지 못한다. 상대가 먼저 발톱을 드러내길 기다려야 한다. 아직은 단언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대비책이 필요한 건 분명했다. 지수는 통행증을 발급해주는 곳에 새것을 만들어 두라 일렀다. 또한 그 끝을 은줄로 매어 금희가 늘 몸에 지닐 수 있게끔 했다. 그...
“낭자, 나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요.” “예. 하문하십시오.” “호족가 아가씨들은 무엇을 배우나요? 어떤 걸 할 줄 알아요?” “예?” 뜻밖의 질문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소녀가 공손하게 조아렸다. “저는 서출이라 적녀인 아가씨들과는 기량이 크게 다를 겁니다.” “공통적인 것만 이야기해주어도 돼요.” “서북에서 자란 호족가의 아가씨라면 누구나 말 타는 ...
각인이 근본적인 것을 바꿔놓았다. 예전에 지수는 본심을 말하기 어려웠다. 정한에 대한 애정을 도드라지게 느낄 때면 버겁기까지 했다. 함께 살면서 더욱 뚜렷하게 보인 격차 때문이었다. 신분 차는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거처, 아랫사람들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지수가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는 해도 엄밀하게 따지면 이건 지수의 소유가 아니었다. 정한에...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분명히 잠들 때는 은은한 등을 밝혀둔 침실이었건만, 지금은 촛불 하나도 없이 사위가 캄캄했다. 옆으로 누운 몸 아래는 폭신한 보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저 딱딱하기만 했다. 흙냄새가 옅게 올라오는 걸 보면 지하인 것 같았다. 초국의 신전에서 벌 받을 적이면 토굴에 처박히곤 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오래된 공포심이 곧장 치...
지수가 미리 맞춰둔 대로 답례를 하는 듯 마는 듯했다. 공작가에 대한 호기심은 숨긴 채였다. 시들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눈짓만 까딱한 뒤 얼굴을 돌리자, 정한이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타일렀다. “귀인, 왜 또 그러느냐. 마차 안에서도 그리 까탈을 부리더니.” 우는 아이라도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물론, 지수는 이를 모르는 척해야 했다. “제가 괜히 생트집을...
서북에 전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정한이 호족들에게 여름 알현을 취소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병대 소속 병사들이 각지로 흩어졌다. 경들이 고했던 바와 같이 금년에는 조세 부담이 컸고, 역참과 도로를 정비하는 토목 공사도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굳이 왕성까지 와 본왕을 알현할 필요 없다. 본왕이 영내를 시찰하며 경들의 가택으로 몸소 방문...
지수는 포도주를 안은 채 처소로 돌아왔다. 이것을 동영에게 맡기고는 어울릴 만한 요리를 만들어달라 부탁했다. 준비되는 동안 정한의 집무실로 가 식사를 함께하자 청할 생각이었다. 영민한 그이니 밤을 같이 보내자는 뜻임을 바로 알아챌 것이다. 처소에서 다시 나서기 전에는 모처럼 단장했다. 얼마 전 정리가 된 옷방에서 의복부터 골랐다. 지수는 서북에 온 뒤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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